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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분야

간호학 이금전의 업적 및 인물소개

by Nursing information 2020.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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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인물소개

 이금전은 190069일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206번지에서 아버지 이원근과 어머니 박애덕의 12녀 중 장녀로 출생하였다. 일찍이 개화하고 여유 있는 집안에서 자랐지만, 3세에 영유아 감염률이 매우 높았던 두창을 앓았고 다행히 회복되었으나 그 후유증으로 얼굴에 마마 자국이 남았다. 이금전이 열 살 정도 되었을 때 이를 안타까워하는 어머니께 그 이유를 물었고, 친척 중에 두창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사망한 경우가 있어 자신은 예방접종을 받지 못해서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금전은 훗날 신문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두창 감염을 계기로 앞으로 내가 어른이 된다면 이러한 병마를 쫓아버리는 일을 하여서 우리 어머니와 같은 슬픔에 잠기는 어머니가 없도록 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먹게 된 것”, 그리고 이 마마라는 병 때문에 생긴 어머니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하여 예방의학에 속하는 공중보건 사업에 헌신할 것을 마음에 다짐 준 것이라고 보건의료에 헌신하게 된 동기를 밝혔다.

 이금전은 소녀시절에 할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후 일제시대 내내 이화학당과 연경대학, 세브란스병원 등 기독교 계열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태화여자관, 조선간호부회 등 기독교 계열의 일터와 조직에서 경력을 쌓아갔다.

 이금전은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졸업 후에 세브란스병원 산파간호부양성소에 입학하였다. 양성소 교수진은 서양인 의사, 서양인 간호사, 한국인 의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금전은 세브란스 산파간호부양성소 재학 중에 학업에만 열중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학생회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이금전은 1929년 세브란스산파간호부양성소를 졸업하고 바로 태화여자관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하는 일인 보건간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해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 이금전의 캐나다 유학에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조선간호부회 대표의 국제간호협의회 참석이었다. 이금전은 국제간호협의회 참석을 마치고 토론토로 가서 토론토대학 공중위생학과에 입학하였다. 1919년 스페인의 인플루엔자 유행 이후 증가한 보건간호사에 대한 수요에 부응하여 토론토대학 공중위생학과에서는 1920년부터 보건간호학전공자 러셀(Russell, E. K.)이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기존의 병원 중심 간호교육에 사회사업과 보건교육을 포함시켜서 캐나다뿐 아니라 세계의 보건행정과 보건교육 지도자를 양성하는 등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러셀은 캐나다 최초로 대학에 기반한 간호교육을 실시하여 1928년에는 보건위생학과 내의 전공으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토론토 대학에서 이금전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Ⅱ. 인물의 업적

1. 태화여자관에서의 활동

 이금전은 캐나다 유학을 마치고 태화여자관으로 복귀하였다. 태화여자관은 1924년 선교의사 홀(Rosetta Hall), 선교간호사 로젠버거, 그리고 동대문부인병원 간호부양성소 졸업생 한신광이 영유아보건사업을 시작한 곳이었다.

 로젠버거는 자신이 외국인이어서 조선인들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받지 못하여 사업을 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함께 일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조선인 간호사를 학수고대하던 상황이었다.  이때 이화여전 문과 졸업, 세브란스병원 산파간호부양성소 졸업, 간호부 및 산파 면허 소유, 그리고 캐나다 토론토 대학 공중위생학과 졸업의 자격을 갖춘 이금전이 합류하게 되었다.

 서양인 간호사가 함께 보건간호사업을 할 능력을 가진 외국 유학자 경험자를 조선인 간호사 중에서 찾는다면 이금전 밖에 없었고, 바로 그 이금전이 사업에 합류하면서 태화여자관의 보건간호사업은 힘을 얻게 되었다. 그 외에 조선인 간호사로 전정윤이 합류하고 여기에 동대문부인병원 의사 길정희, 세브란스병원 의사 에비슨 등이 사업을 적극 지원하면서 태화진찰소의 아동보건사업은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조선의 보건간호사업을 선도하는 위치에 있던 태화여자관은 경성에서 보건사업을 실행하고 있던 세브란스병원, 동대문부인병원과 함께 1929년 경성연합아동건강회를 조직하였다. 경성연합아동건강회의 목적은 어린이에게 안전한 한국이었으며, 경성 전체에 하부 조직을 건설하고 동대문부인병원, 태화여자관, 세브란스병원이 각각 인근 지역을 담당하는 중심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출범연도인 1929년에 경성연합아동건강회에서 수행한 사업은 건아 클리닉, 산전 사업, 가정방문, 학교에서의 건강 진단, 학교에서의 건강 강연, 어머니 모임, 목욕소, 두유 보급을 포함하는 우유 보급소, 11회 간호부들의보건 집담회(health conference), 11회 유아 주간 등 열가지에 달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1933년에는 사업의 범위가 건강아 진찰소, 임신 중의 위생, 가정방문, 학교의 신체검사, 소학교와 중학교와 전문학교에서의 위생 강연, 자모회, 빈민 아동을 위한 무료 목욕장, 우유 공급소(콩젖도 사용), 11회의 간호부 상담회, 11회의 영아주일, 전염병 예방을 위한 면역 주사, 외래 환자들을 위한 산부인과, 치과 등으로 확장되었으며 등록되어 있는 영유아의 수가 거의 800명에 달할 정도였다.

 특히, 1924년 시작된 영유아 무료 건강진단과 건강아 선발은 사회적으로 큰 인기를 끌어 매년 5월 개최되고 있었는데, 1935년에는 어린아이 잘 기르는 법 지도회, 우량아 시상식, 만 다섯 살 유아 25명에 대한 졸업증서 수여식등을 하였다. 특히, 졸업증서 수여식은 이금전이 취지 설명을 한 것으로 보아 이 행사를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이금전은 어머니들이 읽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위생 관련 소책자 집필했는데, “영양과 건강”, “자모회 공과등이 널리 읽혀졌다.

 경성영아보건연합회는 1935년 태화여자관에서 독립하여 정동에서 일을 시작했다가, 1936년 동대문부인병원 안 간호학교 건물로 옮기고 사업을 크게 확장시켰다. 그리고 경성에서 유일한 탁아소로 경성탁아소를 건설하여 어머니가 병이 걸렸거나 사망하여 직접 키울 수 없는 영유아를 양육하였다. 경성탁아소는 조선사회의 커다란 관심대상이었는데, 서울 유일의 탁아소로써 최신 설비를 갖추고 영유아의 위탁보육과 주간보호라는 신개념의 사업을 했기 때문이다.

 이금전은 1930년대 내내 태화여자관과 경성연합아동건강회, 경성탁아소 등에서 활동하면서 보건사업 전문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1938년 동아일보에서 여성조선의 기라군성이라는 연재를 통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 여성을 소개할 때 건강한 애기를 기르는 경성아동 보건회 이금전 - 영아부를 조직하고 건강 진찰을 하며 자모회를 조직하고서 다달이 위생 강연도 하고 인공영양부에서는 젖이 없거나 부족한 애기들의 먹을 것을 준비하며 또는 여러 사립 소학교에 다니면서 아동 위생을 강화하며 회원의 가정을 방문하여 육아에 관한 상담도 한다.”라고 기술되기도 하였다.

 이금전은 선교계 사업 이외에도 필요로 하는 곳에 자신의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제공하였다. 19316월에는 일간지에 여름에 주의할 십이지장충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하여 십이지장충의 감염경로, 증세, 예방법, 치료법 등을 소개했는데, 특히, 어린이가 맨발로 생활하다가 십이지장충에 감염되지 않도록 예방할 것을 강조하였다. 1932년에는 종로의 광중의원에서 무산아동 무료진료소를 설치하여 주 2회 무료 진료 및 투약 사업을 시작했는데, 이금전은 이곳의 건강상담부 담당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금전은 간호사의 전문직단체인 조선간호부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23년 서양인 선교간호사와 선교계 간호학교 졸업생이 결성한 조선간호부회는 회장은 서양인 선교간호사, 부회장은 조선인 간호사가 맡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는데, 이금전은 1932년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금전은 조선간호부회에서 주로 학술적인 측면에서 활동했는데, 특히, 1933년 조선간호부회에서 펴낸 우리나라 최초의 보건간호학 단행본 공중위생간호학이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이금전은 조선간호부회에서 진행한 여타 간호학 교재의 출판에도 기여하였다.

 이금전은 학문과 실무 경력을 기반으로 이화여전과 세브란스에서 강의도 하였다. 이화여전에서 담당과목은 간호학과 위생학이었으며, 세브란스 산파간호부양성소에서 보건간호학을 교수하였다.

 이금전은 한국 나이로 서른 다섯에 결혼하게 되었고, 배우자는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첫 약제사 시험 합격자인 홍호연이었다. 이 때 이금전은 이미 결혼과 신혼여행 소식이 일간지에서 실릴 정도로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2. 보건후생부 보건간호과장 및 세브란스고등간호학교장 시절

 1945년 해방과 함께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은 보건사업을 담당할 정부 부서를 중시하여 위생국을 출범시켰고, 이후 보건후생국으로 조직을 확대하였다가 19463월에는 보건후생부로 격상시켰다. 보건후생부는 산하에 간호사업국을 두었다.

 간호사업국은 간호사업자문위원회를 두어 주 1회 회의를 하면서 주요 사업을 심사하였고, 산하에 간호교육과, 병원간호행정과, 산파과, 보건간호과, 등록과, 서무과 등 6개 과를 두었다. 간호사업국장으로는 홍옥순이 임명되었고, 미군정 초기부터 간호사업 관련 업무의 통역 겸 사무를 돕고 있던 이금전은 보건간호과장으로 임명되어 행정적 능력을 발휘하면서 전국적 차원의 보건간호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 간호사들이 보건간호 강습을 받은 후 시 보건과 간호사업계의 직원으로 활동하게 함으로써 전국적 보건간호 체제의 틀을 짠 것이다

이금전은 손경춘, 김정선 등 보건간호사업의 경험이 있는 간호사들과 함께 보건간호 강습을 이끌었다. 강습을 마친 간호사들은 전국 각지에 배치되어 무의촌 순회진찰 협조, 모자보건 진찰소 협조, 가정방문과 응급조산, 병원간호행정상태 시찰, 간호학교 교육 실태조사, 고아원 양로원 이재민 구호소 및 일반 초등학교의 위생상태 시찰, 면역주사 시행 시 협조, 간호원 등록 산파 자격 및 개업실태 조사, 간호원회 산파회 조직 및 후원 등 모든 사무를 본청과 연락등의 일을 하였다.

 이금전은 194611, 간호사업국장 홍옥순과 함께 조선간호협회를 발족시켰다. 이금전은 19484월 하와이 한인회 초청으로 미국 호놀룰루에 가서 보건간호교육 및 병원 간호관리 시정을 연구할 기회를 가졌다. 그리고 이듬해 3월에는 세브란스 고등간호학교 10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간호교육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남하하면서 세브란스 고등간호학교와 병원도 남쪽으로 내려갔고 이금전도 피난하였다. 이금전은 거제도 장승포에서 이어진 전시 간호학교의 행정책임자로써 서울로 복귀하기까지 전쟁 중임에도 간호교육의 맥을 이어나갔다. 이금전은 전쟁으로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압축수업을 하도록 하여 학생들이 졸업할 수 있도록 했는데, 압축수업이라고 해도 교과과정과 실습 일수를 철저히 지켰으며 그 결과 1949년 입학생 중 16명이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전시간호학교에는 세브란스 간호학교 학생 외에도 적십자, 철도, 춘천간호학교 학생들이 같이 공부했는데 이금전이 교장으로써 재량을 발휘하여 이들도 수료증을 받도록 하여 간호인력이 절실했던 전시 상황에서 향후 간호학력을 인정받고 간호사로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금전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에서 1952년까지 세브란스병원 11대 간호원장으로도 일하였고 마산에 북한군의 침입이 임박하여 모든 병원 직원이 철수했을 때 홀로 병원에 남아 환자를 간호하였다. 이렇게 한국전쟁 중에 간호교육과 부상자 간호를 위하여 헌신한 것을 인정받아 이금전은 19535월 보건사회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3. 대한간호협회 및 중앙간호연구원 활동

 이금전은 한국전쟁 중에 피난지 부산에서도 대한간호협회활동을 계속하였다. 1952513일에는 대한간호협회 이사이자 국민의료령의 산파 간호원 법규에 관한 연구위원의 한명으로 선정되었다. 연구위원들은 간호사 면허 검정시험이 시행되는 상황에서 간호사의 자격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다. 그 결과 전쟁으로 간호사의 수요는 크지만 공급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점을 고려했을 때 간호사 검정고시를 폐지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험 시행을 각 도()의 장관에게 일임하지 말고 중앙에서 받아 국가시험으로 시행함으로써 그 수준이 통일되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해 달라고 정부에 진정하였고, 이금전도 진정 대표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금전은 협회에서 편집부원으로써 간호교과서를 번역 출판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19547월에는 협회 기관지 대한간호를 출간하였다.

 이금전은 19545월 대한간호협회 회장에 피선되어 이후 19584월까지 만 4년간 4대 및 5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재임 중 대한간호협회가 명실상부한 간호사의 전문직 단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데 주력하였다. 그중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은 대한간호협회가 1923년 출범한 조선간호부회를 계승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의미의 총회 차수 변경이었다. 그 다음 협회 건물 마련에 노력하였다. 또한, 대한간호협회를 사단법인으로 인가 신청하는 것을 추진하여 1957726일 사단법인체로 공인받음으로써, 의료법에 의한 간호원의 중앙회가 되도록 하였다. 그 과정에서 간호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제고를 위하여 일제시대의 공식 명칭인 간호부가 혼용되고 있던 것을 금지시키고 간호원으로 통일하였으며 간호원 중앙회라는 것이 명칭에서 분명히 나타나도록 대한간호협회대한간호원회 개정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기관지 대한간호가 정규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19574월에는 대한간호학생회를 협회 산하단체로 출범시켰으며, 1957527일부터 로마에서 열린 11회 국제간호협의회에 참석하여 국제 교류를 촉진하였다. 해방 직후 이금전이 노력을 기울이다가 정부 조직 축소로 중단되었던 간호사 재교육은 한국전쟁 종전 직후인 19545월 중앙간호연구원이 개원하면서 재개되었다. 중앙간호연구원은 보건사회부 간호사업과의 산하 조직으로 이금전은 원장으로 부임하여 전시 중에 간호학생들이 정상대로 간호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보충시키고 또는 한층 더 연구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간호사 재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전시 후에 임시적 조치로 된 기관인 고로 그 사업을 할 만한 건물도 없고 운영자금도 없을 뿐 아니라 이러한 사업은 어떤 큰 기관에 부속되어 가지고 발전을 보는 것이 정상적일 것이므로 단독으로 운영해 나간다는 것은 장래가 별로 희망적이 못 된다는 이유에서 폐지되었다. 중앙간호연구원은 폐지되었지만 간호사 재교육은 중단되지 않았다. 국립의료원과 국립중앙보건소에서 이를 이어나가 국립의료원에서는 병원 간호사를 모집하여 재교육 훈련사업을 하였다. 국립중앙보건소에서는 계속 늘어나고 있던 보건소에서 일 할 수 있는 간호사 훈련을 1958년부터 실시하였다. 한편 이금전은 중앙간호연구원 폐지 후에 중앙의료원 간호과장으로 일하면서 이화여대 교수 손경춘 등과 함께 보건간호지침을 저술하였다.

 이렇게 간호교육, 행정, 조직을 아우르며 지도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던 이금전은 그 공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아 연이어 상을 받았다. 1955년에는 서울시 공관에서 표창을 받았는데, 이 표창은 서울시에서 광복 1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해방 후 사회 각 분야에서 공공사업을 위해 활동한 19명의 여성에 대하여 준 것이었다. 이금전은 의료계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을 받았다.

 또한, 2년 후인 1957년에는 보건사회부로부터 상을 받았다. 195747일 제 6회 세계보건일을 맞아 보건사회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우리나라 보건사업에 공이 큰 12명에게 표창장과 감사장을 수여했는데 그중 포함된 것이다.

 1959년 이금전은 간호계의 발전과 국민보건 향상을 위하여 헌신한 점을 인정받아 나이팅게일기장을 수여받았다. 나이팅게일기장은 1920년부터 국제적십자사에서 간호활동이나 보건사업에 현저한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국제 기념 메달을 수여하는 것으로 1957년 제16회 나이팅게일기장 수여에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이효정이 선정되었고, 이금전은 1959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나이팅게일기장을 수여받은 것이다. 이금전의 나이팅게일기장 수상은 한국간호계의 명예를 국내외적으로 높이는 경사였다.

 

4. ‘보건간호학저술

 이금전은 1960년 모든 공직에서 은퇴하였다. 그러나 은퇴 후에도 보건간호 발전과 간호사의 지위 향상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1963722일에서 24일까지 중앙의료원에서 개최한 간호 사회과학 교육 세미나에서 직업적 태도 및 간호원의 복장-간호윤리 정신에 입각하여를 발표하였다. 이금전은 직업과 태도의 정의에서 출발하여 간호사의 직업적 태도를 11가지의 문답 형식으로 검토한 후, “간호직업에 대한 태도는 항상 이 사업을 질적으로 향상과 발전을 시키는데 목적을 두어 환자들에게 좀 더 좋은 봉사를 하며 동시에 간호원의 사회적 지위가 국내 국외에서 더욱 견고해져야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어 간호사의 복장에 관하여 그 유래와 변천과정을 짚은 후, 간호직업의 위신을 손상케 하지 않도록 복장에도 관심을 갖고 옷차림을 할 것을 캡, 유니폼, 구두 등으로 나누어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1965년에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캘리포니아 로마린다에서 거주하면서도 간호 논문 작성과 저술에 힘을 쏟았다. 이금전의 본격적 논문으로는 유일하게 알려져 있는 보건간호 면에서 본 결핵간호1966년 연세대 간호학 연구소에서 발행한 간호학회보 1권에 실린 것이다. 이금전은 이 논문에서 우리나라의 결핵 사업을 해방 전, 해방 후, 대한결핵협회, 세계 기독교 봉사회 등으로 나누어 살펴본 후, 가정방문을 통하여 파악되는 우리나라 결핵 환자의 특징을 기술하고 스칸디나비아와 세계 보건기구의 결핵 사업도 검토하였다. 그리고 간호사가 결핵 환자를 면접할 때 알고 있어야 할 항목을 16개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1967년에는 자신의 보건간호에 관한 지식과 경험의 집대성 보건간호학을 완성하여 출판하였다. 우리나라 저자의 보건간호학 단독 저서로는 김옥실에 이어 두 번째였다. 책 구성은 크게 총론과 각론의 두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총론에서 보건간호의 역사적 고찰, 보건행정, 보건사업의 배경, 공중보건의 정의와 원칙, 보건간호 윤리, 공중보건의 발전원인과 보건소사업 계획 및 활동, 보건간호 직무 한계, 보건간호 가방 사용하는 법, 보건간호원과 보건소 업무, 보건간호 처무규정, 보건간호에 관한 면접, 응급처치, 환경위생, 보건교육, 보건간호 감독하는 법, 기록과 보고, 보건통계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각론은 모성보건 간호, 가족계획, 영유아 보건간호, 학교보건, 학교보건간호, 산업보건간호, 결핵관리와 보건간호, 전염병관리와 보건간호, 소아마비병, 성병과 보건간호, 나병과 보건간호, 기생충학으로 나누어 생애주기별 보건사업과 주요 이슈별 보건사업을 기술하였다. 책의 맨 마지막에는 부록으로 의료법 등 주요 관계법규를 실어서 실무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금전은 1973417일 대한간호협회 창립 50주년 기념 최고 공로상 수상자 13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으며 1979년에는 대한간호 100호를 기념하여 대한간호의 발자취와 전망을 기고하였다. 이금전은 이 글에서 우리나라 간호의 역사를 약술하고 대한간호 100호의 의의를 짚었을 뿐 아니라 일차보건의료의 견지에서 간호사의 역할과 보수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1900년 출생하여 평생을 우리나라 간호 발전에 헌신한 이금전은 199057일 영면하였다.


출처

 이꽃메, 한국 지역사회간호의 선구자 이금전에 관한 역사적 고찰, 지역사회간호학회지 제24권 제1, 2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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